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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겸  손

                                                앤드류 머레이


    머리말

    우리에게는 겸손할 수밖에 없는 세 가지 큰 동기가 있다. 첫째는 우리가 피조물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죄인이기 때문이고, 셋째는 성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첫째 동기를 하늘의 천군천사들에게서, 타락한 인간에게서, 인자 예수님에게서 본다. 두 번째 동기는 타락된 상태에 있는 우리에게 피조물로서의 우리의 바른 위치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제시한다. 세 번째 동기에서 우리는 은혜의 신비를 본다. 이 은혜의 신비는 우리가 압도적으로 큰 구속의 사랑가운데 자신을 망각할 때 겸손이 영원한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하는 우리에게 합당한 덕성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적인 신앙교육에서 위의 두 번째 국면이 과도하게 부각되었고, 강한 자책이 겸손의 비결이라고 생각하기도 하면서, 우리는 무無가 되고 하나님께서 만유가 되시는 것이 피조물인 우리에게 가장 자연스럽고 아름답고 복되다는 사실을 알도록 인도를 받지 못했고, 또한 가장 겸손하게 되는 이유는 죄 때문이 아니라 은혜 때문이라는 사실과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Viewer하고 신이시며 창조주이시며 구속주로서 놀라운 영광중에 계신 하나님과 함께 사역할 때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가장 낮은 자세를 취하게 된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지적되지 않았다는 것, 이 두 가지로 인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이 손상을 받고 있다.


    우리가 진실로 사람들 앞에서와 사람들에 대해서 겸손 하려 한다면, 그리고 겸손이 우리의 기쁨이 되려 한다면, 우리는 겸손이 죄로 말미암은 수치의 표적만이 아니라 죄와는 완전히 무관하게 예수님과 하늘의 아름답고 복된 옷을 입는 것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종의 형체를 취하심을 영광스럽게 생각하셨다. 그리고 모든 사람의 종과 돕는 자가 되는 것처럼 거룩하고 복된 일이 없다는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 자신의 지위를 잘 알고 있는 충성된 종은 자신의 주인이나 주인의 손님들을 시중드는 일에서 참된 기쁨을 얻는다. 겸손이 통회와는 비교할 수 없이 무한하게 심오하다는 것을 알고, 겸손을 예수님의 삶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겸손이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고결함이라는 사실과,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 겸손을 증명하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의 운명을 가장 고귀하게 성취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할 것이다.


    제1장. 피조물의 겸손인 영광

    “그들이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4:11)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실 때 한 가지 목적을 갖고 계셨다. 그것은 피조물로 하여금 자신의 완전하심과 축복에 참여하게 함으로 그들 가운데 자신의 사랑과 지혜와 권능을 나타내시려는 목적이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들과 교통하심을 통해 하나님 자신의 자비와 영광을 충만히 베푸심으로 그들 가운데, 그리고 그들을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이 교통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에게 주시는 것은 그들 스스로 소유할 수 없는 것이었고, 또한 그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께서 영원무궁토록 살아 역사하시며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며, 만물은 하나님 안에서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피조물의 하나님과의 관계는 부단하고 절대적인 의존 관계일 수밖에 없다. 진실로 피조물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매 순간 바로 그 동일한 능력으로 붙들어주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현재의 그리고 영원토록 피조물의 주된 관심과 최고의 미덕과 유일한 행복은, 하나님께서 자신 안에 거하시사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을 나타내실 수 있도록 자신을 비우는 것이다. 이같이 만물의 본질에서 볼 때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의존인 겸손은 첫 번째 의무이자 최고의 미덕이며, 모든 도덕의 기초인 것이다.

    Viewer 

    따라서 교만함, 곧 이 겸손의 상실은 모든 죄악의 근원인 것이다. 잃었던 겸손의 회복, 즉 피조물이 하나님과 원래의 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우리의 구원이 될 수 없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바로 겸손을 우리에게 돌리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겸손에 동참하게 함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던(빌2:8)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이란 다름 아닌 예수님 자신의 삶과 죽으심, 예수님 자신의 성품과 정신, 즉 예수님의 하나님과의 관계의 근본이며, 예수님의 구원의 역사의 근원인 예수님 자신의 겸손을 전달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겸손은 곧 우리의 구원이고, 예수님의 구원은 곧 우리의 겸손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의 삶은 죄로부터 해방되어 원래의 상태로 회복되었다는 증거 –그들의 삶에 고루 퍼져있는 겸손으로 특징지어지는 하나님과의, 그리고 이웃들과의 완전한 교제-를 나타내어야 한다. 이 증거가 없다면 진정한 하나님의 임재하심 안에 거함은 있을 수 없다. 또한 하나님의 은총과 성령의 능력의 진정한 경험은 있을 수 없다. 이 증거가 없다면 변치 않는 믿음, 사랑, 기쁨, 그리고 능력은 존재할 수 없다.


    겸손은 은혜가 뿌리를 내리는 유일한 토양이다. 겸손은 모든 장점이나 미덕의 근본이다. 왜냐하면 겸손으로만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자세를 가질 수 있고, 하나님을 전능의 하나님으로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겸손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거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다. 겸손은 우리의 완전히 무익함을 깨닫는 의식이다. 이 의식은 하나님께서 참으로 만유가 되신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을 때 생겨나는 것이며, 우리로 하여금 만유가 되시는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하는 의식이다. 피조물이, 겸손이 참으로 고귀한 것임을 깨닫고, 자신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겸손하기로 동의하고, 또한 하나님의 생명과 영광이 역사하고 나타나는 도구가 되기로 동의할 때, 그는 겸손이란 다름 아닌 피조물로서의 자신의 진정한 위치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하나님의 자리를 바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겸손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소망과 기도와 믿음과 실천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말씀을 연구함으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매우 명백하게, 그리고 자주 반복하여 제자들에게 이 점에 대하여 어떤 교훈을 하였으며, 또한 그들이 예수님을 얼마나 더디게 이해했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말씀의 묵상을 시작할 때 교만이 인간의 본성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시야에서 음흉하게 감추어져 있으며, 이보다 더 다루기 힘들고 위험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도록 하자. 마음을 굳게 하고 참을성 있게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섬기는 것 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겸손이라는 미덕에 있어서 우리가 얼마나 부족한지, 그리고 우리가 마땅히 구해야 하는 것을 얻는데 있어서 얼마나 무능한지를 깨닫지 못하는 것을 느끼도록 하자. 우리의 영혼이 그리스도의 겸손을 사랑함과 사모함으로 가득 찰 때까지 그리스도의 이 성품을 연구하자. 그리고 우리의 교만함을 깨닫고, 또한 이 교만을 몰아내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함을 Viewer깨닫고 주님 앞에 무너질 때, 예수 그리스도 자신께서 친히 오셔서 우리 안에 전달하시는 자신의 놀라운 생명의 일부분으로 이 겸손의 미덕까지 전달하신다는 것을 믿자.


    제2장. 속죄의 비결인 겸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교만함으로 인하여 천국에서 쫓겨난, 악마의 본성인 교만을 갖고 있는 옛 뱀은 하와를 유혹하고, 하와가 그 유혹에 굴복했을 때, 그 독은 하와의 생명과 영혼 속으로 들어와서 우리의 영원한 행복이 되었을 겸손과, 하나님께 대한 의존을 영원히 파괴해 버렸고, 하와로부터 이어지는 인류의 생명까지 그 뿌리에서부터 부패하게 되어 행복대신 모든 죄악과 저주들 중에 가장 무서운 것 즉 사단 자신의 교만의 독을 갖게 되었다. 이 세상에 나타나는 모든 비참함과, 민족들 간의 모든 전쟁과 피 흘림, 모든 이기심과 고통, 모든 야심과 질투, 모든 상한 심령과 괴로운 삶은 우리가 매일 만나는 모든 불행과 함께 바로 우리 자신의, 또는 다른 사람들의 이 가증스럽고 끔찍한 교만으로 인하여 생겨나는 것이다. 바로 이 교만 때문에 속죄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다른 무엇보다 속죄를 받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우리의 교만함 때문이다. 그리고 속죄의 필요성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우리가 우리 자신 속에 들어와 있는 이 교만이라는 권세의 무서운 본능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는가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교만은 우리의 안과 밖 모두에 존재하는 무서운 영적 세력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우리는 교만을 우리 자신의 본성으로 고백하고 애통할 필요가 있을 뿐 아니라, 그 사단적인 기원을 알아야 한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교만을 정복하여 몰아낼 수 없다는 절망의 탄식을 발할 수밖에 없다. 그Viewer러나 이 사실로 인해 우리는 곧바로 우리의 구원을 유일하게 발견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능력이 하나님의 속죄라는 사실로 인도될 것이다. 우리 안에 존재하는 자아와 교만을 대항하고자 하는 무익한 투쟁은 우리가 이 모든 것의 배후에 있는 흑암의 세력을 생각해 볼 때 더욱 무익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완전한 절망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닌 능력과 생명 –곧 사단과 사단의 교만을 몰아내기 위하여 하나님의 어린양에 의해 우리에게 전달된 천국의 겸손 –을 깨닫고 받아들이는데 더 합당하게 할 것이다.


    성육신 가운데 들어온 하나님의 생명은 우리가 그 위에 서서 자라야 할 뿌리이다. 우리 안에서 매일 역사하는 이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였고, 부활로 이어졌던 것과 동일한 전능의 능력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계시된 이 생명을 배우고 알고 의지해야 한다. 이제 이 생명은 우리의 소유가 되어 우리의 존재 전체를 소유하여 다스리는데 우리가 동의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구속자로서의 그리스도의 모든 특성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바른 생각을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겸손이다. 자신을 비우시고 인간이 되신 그리스도, 종의 형체를 입은 그리스도의 지상생활, 그리고 그리스도의 대속, 그리스도의 승천과 영광이 바로 보좌로 높임을 받고 영광의 면류관을 받았던 것이 바로 겸손이셨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낮추심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높이셨던 것이다(골2:9). 그리스도께서는 인성으로 구현된 하나님의 겸손이시다.


    만일 이 예수님께서 나무의 뿌리라면 그 뿌리의 본성은 모든 가지와 잎과 열매에 나타나야 한다. 겸손이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 으뜸이 되며 모든 것을 포함하는 미덕이라면, 그리고 예수님의 대속의 비밀이 겸손이라면, 우리의 건강하고 힘 있는 영적 생활은 우리도 이 미덕을 으뜸으로 내세우느냐 아니냐에 전적으로 달려 있을 것이다. 겸손은 그리스도에게서 우리가 가장 사모하는 성품이 되어야 하며, 우리가 구하는 가장 중요한 사항이 되어야 하며, 우리가 이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뿌리인 겸손이 무시되고 망각됨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이 자주 연약해지고 열매 없는 삶이 되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겸손하심으로 획득하셔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의 기쁨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자아가 완전히 죽는 곳에 거하는 겸손, 예수님께서 행하신 바와 같이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만을 구하여 인간의 모든 영광을 포기하는 겸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되시고 주님만이 존귀하심을 얻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을 완전히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는 겸손, 참으로 그런 겸손이 우리의 가장 큰 기쁨보다 더 추구하는 것이 되고, 어떤 희생을 치르고라도 얻으려 하는 것이 되지 않는다면, 기독교가 세상을 정복할 소망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사랑이 얼마나 부족한지, 얼마나 다른 사람들의 요구와 감정과 연약함에 대하여 무관심한지 생각해보자. 종종 바르고 정직하다는 구실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중상을 퍼뜨리는 데는 얼마나 신랄하고 신속한지! 모든 울화와 성마름과 분노의 표현, 모든 몰인정하고 원한에 찬 감정들, Viewer이 모든 것들은 언제나 자신의 유익만을 찾는 교만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음울한 교만이 거의 모든 곳에 침투해 들어오고 있는 것을 눈을 뜨고 봐야 한다.


    예수님의 겸손을 배워라. 바로 이 겸손이 여러분의 구원의 비밀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근원이다. 매일 매일 이 겸손 속에 깊이 몸을 담그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그리스도께서, 신령한 겸손으로 여러분을 위해 역사하신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속에 거하시기 위하여 들어오사 역사하심으로 여러분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사람으로 만드실 것을 진심으로 믿어라.


    제3장. 예수님의 삶에 나타난 겸손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22:27)


    요한복음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제시된 우리 주님의 내면적 생활을 볼 수 있으며, 예수님의 겸손이 가장 명확하게 제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시고 이제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계시는 구속의 본질과 구속의 삶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되시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 자신께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성자께서는 성부께서 자신 가운데서 역사하시도록 하기 위해 자신을 성부의 뜻과 권능에 맡기셨다. 자신의 능력, 자신의 뜻, 자신의 영광, 자신의 역사와 가르침과 더불어 자신의 사역 전체, 이 모든 것에 대해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 나는 일하시는 아버지께 나 자신을 드렸노라.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아버지께서 모든 것이라’고 거듭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완전한 자기 포기, 절대적인 복종과 아버지의Viewer 뜻에 대한 의존의 삶이 완전한 평안과 기쁨의 삶이라는 것을 발견하셨다. 이것이 우리 구주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진정한 자기 부정이다. 이것은 곧 우리 자신에게는 하나님께서 채워주셔야만 하는 빈 그릇 외에는 선한 것이 전혀 없음을 인정하고 우리 자신이 무엇이 되겠다거나 무엇을 행하겠다고 요구하는 것은 일순간도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되시기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선하여 우리 자신의 존재와 행위를 그리스도의 본성에 순응시켜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참된 겸손의 근원과 본질을 본다. 인간의 겸손이 그처럼 형식적이고 빈약한 이유는 이 참된 겸손의 근원과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한 그것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얼마나 온유하고 겸손한 심령을 소유하셨는지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전해 주려고 오신 삶이 바로 이렇게 죄와 자아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삶이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생명 얻기를 간절히 원한다면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순간순간마다 만물가운데서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비밀의 지식을 구해야 한다. 모든 자연과 모든 피조물, 특별히 모든 하나님의 자녀가 증거자가 되는 이 비밀의 지식이란 하나님께서 자신의 풍성한 지혜와 능력과 선하심을 모든 피조물을 통해 나타내고 계시며, 따라서 피조물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그릇이며, 통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모든 미덕과 은혜의 근원, 모든 믿음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의 근원은 우리가 하나님께 받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하나님께 이로 인하여 가장 겸Viewer손하게 경배하며 섬겨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예수님의 겸손의 생활은 예수님의 삶 전체를 지배하는 정신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와 똑같이 겸손하셨던 것이고, 자신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는 인간들을 위한 하나님의 종이라고 생각하셨다. 예수님의 정신은 자신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복종하는 삶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이 겸손을 예수님의 구속의 본질과 핵심이며, 하나님의 성자의 복되신 삶 자체이고, 하나님 아버지와의 유일한 참된 관계이고,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의 일부분이 될 때 예수님께서 분명히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울 때, 이 하늘에 속한 실재적이며 분명한 겸손의 결여라는 무서운 현실은 무거운 부담과 슬픔이 될 것이고,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첫째 되고 가장 중요한 표적인 이 겸손을 확실히 얻기 위해 평범하고 미지근한 신앙을 버릴 것이다.


    제4장.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나타난 겸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11:29)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20:24)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밝히신 예수님의 마음과 삶에서 겸손을 보았다. 이제부터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귀를 기울여보자. 예수님께서 매우 자주, 그리고 매우 간절하게 가르치신 말씀들을 주의 깊게 연구함으로 감동을 받을 뿐만 아니라, 이 성경 말씀들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바를 깨닫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1.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3,5). 예수께서 천국에 대해 선포하시는 최초의 말씀은 우리가 들어야 하는 유일한 문을 제시하신다. 하늘과 땅의 축복들은 겸손한 자들을 위한 것이다. 겸손은 천국생활에 있어서나 이 땅의 생활에 있어서나 축복을 받는 비결인 것이다.


    2.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9).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선생님으로 제시하신다. 우리가 선생님이신 예수님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정신,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에게서 배우고 본받을 수 있는 정신 모두를 설명해 주시는데, 이것은 바로 온유와 겸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영혼의 완전한 안식을 얻을 수 있다. 겸손은 곧 우리의 구원인 것이다.


    3.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18:4). 제자들은 누가 천국에서가장 큰 자가 될 것인가에 대해 논쟁을 벌이다가 주님께 물어보기로 하고 주님께 나아갔을 때 예수님은 위와 같은 말씀을 하셨다. 천국에서 가장 큰 영광, 진정으로 천국에 어울리는 기질, 미덕 중에 가장 중요한 미덕은 겸손이다.


    4. 세베대의 아들들이 어머니와 함께 예수님께 제일 좋은 자리, 곧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게 되기를 청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7-28). 천국에서 오신 그리스도의 특징인 겸손은 우리의 하늘나라에서 받을 영광의 척도가 될 것이다. 가장 겸손한 사람이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귀한 자리는 가장 겸손한 사람들에게 약속되어 있다.


    5. 높은 자리를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 바리새인들Viewer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마23:11). 겸손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유일한 사다리이다.


    6. 예수님께서는 한 바리새인의 집에서 윗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눅14:1-11), 바리새인과 새리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신 다음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18:14)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들을 향한 깊고 진정한 겸손이 가득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7.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13:14). 그리스도의 이 명령과 권위, 그리고 순종에 대한 모든 사상은 겸손이 제자의 자격에 있어 첫째 되는 요소이며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8. 최후의 만찬 자리에 앉아서도 제자들은 누가 가장 높은가에 대해 언쟁을 벌이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22:26-27). 예수님께서 걸어 가셨고 또한 우리에게 제시하신 길,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며 행하셨고 언제나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정신은 우리를 모든 사람의 종이 되게 하는 겸손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서로 종이 되라고 하신 이 명령을 우리가 진심으로 수행할 때 이 섬김도 가장 복된 일이 될 것이며, 역시 죄와 자아로부터의 새롭고 충만한 자유를 가져다주는 교훈이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되지 않는 것이 피조물의 영광이고, 예수님의 정신이고, 천국의 기쁨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심지어 우리를 괴롭게 하는 사람들까지도 섬겨야 한다는 교훈을 전심으로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다. 우리의 심령이 이 진정한 성화에 압도되면 우리는 자기 포기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를 연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것을 여러분의 유일한 목적과 기도로 삼으라. 물이 항상 낮은 곳으로 흘러 들어가 채워지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항상 겸손하고 비어있는 영혼을 찾고 계시며,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은 그런 영혼 속으로 흘러 들어가 그를 높이고 복을 주신다. 우리의 유일한 관심이 되어야 하는 겸손, 바로 그런 겸손한 사람이 높임을 받을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능력과 크신 사랑으로 그런 사람을 높이실 것이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로 가는Viewer 이 길을 배우라고 우리를 부르신다. 우리의 심령이 온유와 겸손한 생각으로 충만해질 때까지 우리가 지금까지 읽은 말씀들을 깊이 상고할 때, 예수님께서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으로, 그분을 사모하는 심령에 임하시고 거할 것이다.


    제5장.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나타나는 겸손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 지니라”(눅22:26)


    우리는 예수님께서 택하신 열 두 제자들에게서 겸손을 살펴보겠다.

    첫째, 겸손은 여전히 결핍한 상태인데도 열렬하고 적극적인 신앙인이 있을 수 있다. 이 사실은 제자들에게서 엿볼 수 있다. 그들은 열정적으로 예수님을 사모하였고, 예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렸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었고 사랑했으며, 예수님의 명령들에 순종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으며, 예수님과 함께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보다 더 깊은 곳에는 그들이 거의 의식하지 못했던 무서운 흑암의 권세가 존재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예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의 증거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이 흑암의 권세를 끊어 버리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지금도 역시 동일하다.


    우리는 많은 성령의 은사들을 소유하고 나타내며,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축복의 경로 역할을 하는 신앙인들이 시험을 받을 때, 또는 그들과 보다 밀접한 관계를 가짐으로 그들을 보다 자세히 알게 될 때, 확고한 성품으로 겸손의 미덕을 거의 나타내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진실로 이것은 괴롭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모든 사실들은 겸손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고귀한 미덕이며, 가장 얻기 어려운 미덕이며, 오직 성령의 충만함으로 우리가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와 동행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살아 계실 때에만 능력으로 임하는 미덕이라는 교훈을 확인해 준다.


    둘째, 우리는 교만을 정복하고 온유하고 겸손한 심령이 되기 위해 교육과 개인의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교훈을 제자들을 통해 배울 수 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오랫동안 예수님의 훈련을 받았기 때문Viewer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는 교훈을 주셨다. 또 수시로 제자들과 바리새인들과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겸손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그들 앞에서 거룩한 겸손 가운데 생활하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의 가장 깊은 비밀(“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을 여러 번 그들에게 밝히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자신의 모범을 따르라고 그들에게 명하셨다. 제자들은 분명히 예수님의 교훈을 배우려고 애를 썼고 다시는 예수님을 근심하게 하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을 하곤 했지만, 그런 일들은 모두 허사가 되었다. 이처럼 그들이나 우리에Viewer게 크게 필요한 교훈을 가르치기 위해 외적인 훈계로는 부족하다. 아무리 설득력 있는 논증이라 할지라도, 개인적인 결심이나 노력이 아무리 진실하고 성실할지라도 교만이라는 악을 내쫓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거룩한 겸손 가운데 새로운 본성이 능력으로 계시되어 옛 본성과 대치되고, 진실로 우리의 본성이 되지 않으면 그 무엇이라도 교만을 내어 쫓을 수 없는 것이다.


    셋째, 우리가 진실로 겸손하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거룩한 겸손으로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만 가능하다. 우리는 타인으로부터 –즉 아담을 통해- 교만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겸손한 타인 –예수 그리스도-을 통해 받아야 한다. 겸손이 우리의 본성, 우리의 자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제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모든 가르침, 그리고 제자들의 모든 노력은 헛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신적 권능으로 그들에게 임하사 그들에게 사모하라고 가르쳐 주신 바를 주신데 있어서 필요한 준비과정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죽으심으로 악마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죄를 멸하시고 영원한 구속을 이루셨다. 그리고 부활하심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히 새로운 생명을 받으셨는데, 그 생명은 인간들과 교통하실 수 있고 신적 능력으로 인간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삶을 새롭고 충만하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한 인간의 생명이었다.


    그리고 승천하심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성령을 받으신 그리스도께서는 이 성령을 통하여 땅에 계실 때는 하실 수 없으셨던 일을 하시게 되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사랑하시는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서, 사실상 그들을 위하여 그들의 삶을 사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자신과 같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겸손하게 살 수 있게 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 속에서 사시며 호흡하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기 때문이다. 오순절에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강림하사 자신의 소유를 취하셨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으로 말미암은 준비와 확신의 과정, 그리고 사모와 소망의 각성은 오순절에 역사된 놀라운 변화로 말미암아 완전하게 되었다. 야고보, 베드로, 요한의 삶과 서신들은 모든 것이 변화되었다는 사실과 예수님께서 갖고 계셨던 온유와 고난의 정신이 분명히 그들의 소유가 되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겸손이 기독교에서 갖고 있는 독특한 위치에 대한 더욱 깊은 확신을 우리 모두는 찾아야 할 절박한 필요성이 있다. 또한 그리스도의 겸손이 주님의 가장 큰 영광이며, 첫째 되는 계명이며, 우리의 가장 큰 축복이라고 인식되지 않는 한 교회나 성도는 절대로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될 수 없다. 겸손 이외의 다른 은사들은 우리에게 완전한 만족을 줄 수 없으며,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중에서 놀랍게 역사하지 않는 감추어진 원인이 우리가 겸손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고 회개의 기도를 드리자. 교회가 겸손의 아름다운 옷을 입으며, 겸손이 교회의 지도자들과 모든 성도들에게서 거룩하고 아름답게 나타날 때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진리가 신자들의 경험 속에서 요구하는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제6장. 일상생활에서의 겸손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요일4:20)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일상 교제에서 나타내지는 사랑에 의해 평가될 것이고, 우리의 이웃과의 일상생활에서 그 진실성이 입증되지 않으면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은 참으로 엄숙한 진리이다. 그런데 이 진리는 우리의 겸손에 있어서도 동일하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겸손이 사실이고, 겸손이 우리 안에 거하여 우리의 본성이 되었고, 실제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 스스로 아무 영광도 취하지 않는다는 유일한 확실한 증거는 사람들을 향한 겸손이다. 우리의 겸손이 우리의 생활 자체가 될 때, 그 겸손은 우리 형제, 자매들에 대한 우리의 모든 행동과 태도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진실로 우리의 소유라고 할 수 있는 유일한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나타내고자 애쓰는 그러한 겸손이 아니라 우리의 평범한 일상생활 가운데 우리가 몸에 지니고 전달하는 겸손이라는 것이다. 사소하게 보이는 일상생활의 여러 가지 일들은 우리가 실제로 어떤 정신을 소유하고 있는지를 입증하기 때문에 극히 중요하고 또한 영원의 시금석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진실로 어떤 사람인가를 드러내는 때는 바로 우리의 가장 부주의하고 방심하는 순간들이다. 즉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생활들을 통하여 겸손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가 있다.


    참된 겸손은 우리가 하나님의 빛에 비추어 우리 자신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깨닫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되시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을 완전히 죽이기로 동의할 때 생기는 것이다. 이렇게 하고 “저는 자신을 버리고 주님을 찾았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영혼은 더 이상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Viewer 않으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 대한 모든 생각을 완전히 버린다. 그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이웃들을 만나며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을 위해 모든 사람의 종이 된다.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의 가장 연약하고 가장 보잘것없는 자녀를 중시하고 존경하고 왕의 자녀로 대접한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분의 정신은 진실로 가장 낮은 사람이 되고 서로 종이 되는 것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게 한다.


    겸손한 사람은 시기나 질투를 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앞에서 다른 사람들이 대접을 받고 축복을 받을 때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또한 그는 다른 사람들이 찬양을 받고 그 자신은 무시되는 말을 참고 들을 수 있다. 이웃 그리스도인들의 실수와 죄에 대해 까다롭게 참지 못하고 완고한 생각을 가지고 모진 말을 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 겸손한 사람은 “서로 참으며 용서하기를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용서해 주신 것같이 하라”는 말씀을 자신의 생활에 나타낸다. 그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을 때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의 마음도 함께 옷 입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의 겸손은 단순히 자신을 경시하는 생각이 나 말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말하는 긍휼과 자비와 오래 참음을 포함하는 “겸손한 마음”-어린양의 표로 인정되는 다정하며 겸손한 친절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으로 옷 입어야 한다. 그리고 잃은 자들을 구원하는데 열심을 내는 것에만 주님을 닮는 것이 아니라 형제, 자매들과의 모든 교제에 있어서도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신 것같이 오래 참고 용서해야 한다.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말라”(롬12:16).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고전13:4-5). “그러므로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용납하고…항상 감사함으로 그리스도의 두려움 안에서 서로 순복 하라”(엡4:2-).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의 마음이니…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자기를 낮추시고…”(빌2장).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옷 입고…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러하고…”(골3:12-14)

    Viewer 

    우리는 이 성경의 말씀들을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겠다는 약속들로 받아 들이고, 그리스도의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나타내실 바를 말씀하시는 계시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절대로 만족하지 말자. 하나님의 겸손하고 온유하신 어린양께서 우리 마음속에 보좌를 정하심으로 그분의 겸손과 온유가 우리 마음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생수의 시내들 중 한 줄기가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우리의 모든 실수와 허물이 있을 때마다 겸손하고 온유하게 주님께로 돌이키는 기회가 되게 하자.


    제7장. 겸손과 거룩

    “사람에게 이르기를 너는 네 자리에 섰고 내게 가까이 하지 말라 나는 너보다 거룩함이니라”(사65:5)


    우리는 우리 시대의 성화 운동에 대해 말하며, 이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한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거룩함과 믿음으로 말미암는 거룩에 대한 복된 진리들을 전에 볼 수 없이 강조되고 있다. 우리가 추구한다거나 얻었다고 고백하는 거룩이 진리와 생명인가 아닌가 하는 중요한 시금석은 그로 인해 겸손이 증대되어 나타나는가 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 겸손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그의 안에 거하며 그를 통해 빛을 발하게 하는데 필요한 것이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이신 예수님에게 있어서 거룩한 겸손은 그분의 삶과 죽음과 영광의 비결이었다. 따라서 우리의 거룩의 한 가지 무오한 시금석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의 겸손이고 그 겸손이 우리를 특징짓는 것이다. 겸손은 거Viewer룩의 꽃이며 거룩의 아름다움이다.


    가장 거룩한 사람은 항상 겸손한 사람이 될 것이다. 하나님 외에 거룩한 분이 또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모시는 만큼만 거룩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모시는 것이 곧 우리의 진정한 거룩이다. 왜냐하면 거룩이란 바로 하나님께서 전부라는 생각 가운데 자신이 사라지는 것이다.


    가장 거룩한 사람은 가장 겸손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사야 시대의 그 뻔뻔스럽고 교만하게 자화자찬하는 유대인들과 같은 사람들을 오늘날 자주 만나게 되지는 않지만, 그들의 정신은 여전히 믿음의 동료들이나 세상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자기 생각들을 발표하고 일들을 처리하고 다른 사람들의 과실들을 드러내는 태도에 있어서 비록 옷은 회개한 세리의 옷을 입고 있지만 그 말소리는 여전히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고 말하는 바리새인의 말소리인 것이다.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한다”고 했듯이, 이 사랑의 정신이 고루 퍼진 마음에, 이 하늘의 성품이 충분히 자라난 곳에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하나님의 어린 양 그리스도의 형상이 진실로 이루어진 마음속에, 자신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축복하고 용납하고, 그들이 아무리 보잘것없는 사람들이라도 존경하고 높이는 것에서 자신의 축복을 발견하는 완전한 사랑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사랑이 들어오는 곳에 하나님께서 들어오시며, 하나님께서는 능력으로 들어오셔서 자신을 모든 곳으로 계시하시는 곳에서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낮아진 인간은 다른 사람들을 향해 교만할 수 없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일시적인 것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항상 그 아래서 거하는 장막이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낮아지는 곳은 하나님의 성전이 되고 모든 은혜의 말씀과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시여, 우리의 이웃들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말과 감정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겸손을 판단하는 하나님의 시금석이며, 하나Viewer님 앞에서의 겸손이 우리로 하여금 이웃들에게 항상 겸손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소서. 우리의 겸손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 그리스도의 삶이 되게 하소서.”


    거룩함의 진보와 함께 겸손이 증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의 유일한 표적인 자아의 소멸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생각이나 감정만 좋아하고 엄숙한 헌신과 믿음의 행동들만 좋아하게 된다. 여러분이여, 와서 예수님을 보아라! 그리고 예수님의 겸손으로 옷 입을 때까지 예수님 안에 자신을 감추어라. 그렇게 함으로만 우리가 거룩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제8장. 겸손과 죄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종종 겸손은 뉘우치고 통회하는 것과 동일시된다. 그 결과 겸손은 육성되지 않고 영혼은 계속 죄악에 사로잡혀 있게 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겸손이 이것과 다른 것이고 그 이상이라고 배워왔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서간서들의 가르침에서 겸손이 매우 자주 죄에 대한 언급 없이 가르쳐지는 것을 보았다. 피조물의 창조주와의 관계를 볼 때. 그리고 겸손의 삶을 사셨고 우리에게 겸손을 심어주신 예수님의 삶을 볼 때 겸손은 축복의 본질이며 거룩의 본질이다. 겸손은 마음의 왕좌에 자아 대신 하나님께서 앉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되시는 곳에 자아는 무가치한 것이다.


    그러나 겸손이 죄의 회개와 다르다는 사실이 특별히 강조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되는 진리이긴 하지만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은혜가 성도들의 겸손을 얼마나 새롭게 하고 깊고 강하게 하는지는 거의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는 속량을 받은 거룩한 사람이 지울 수 없는 죄인이라는 깊은 의식을 가지고 어떻게 사는가를 알기 위해 사도 바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박해자와 비방자로 바울이 자신을 말한 구절들을 잘 알고 있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9,10).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심이라”(엡3:8).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 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내가 죄인 중의 괴수니라”(딤전1:13-15).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구원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죄를 영원히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Viewer얼마나 무서운 죄악을 범하였던가 하는 사실을 결코 잊을 수 없다. 그가 하나님의 구원의 기쁨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경험이 그를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하게 할수록 자신이 구원받은 죄인이라는 자각은 더욱 분명해졌다. 그렇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의식이 없다면 구원은 아무 의미도 없고 즐거운 것도, 귀한 것도 아니며, 또한 전혀 실감나는 일도 아닌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크신 팔로 건져 내셔서 사랑으로 면류관을 씌우신 자가 다름 아닌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한 순간도 잊을 수 없었다.


    위에 인용한 성구들은 종종 매일매일 짓는 죄에 대한 바울의 고백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이 구절들은 훨씬 더 깊은 의미들을 갖고 있다. 곧 이 말씀들은 영원히 지속하는 바를 언급하고 있으며, 어린양의 피로 죄 씻음을 받고 속량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경배를 드릴 때 수반해야 할 겸손에 대한 경외와 찬양을 깊고 짙은 음조로 전달하고 있다. 그렇다. 비록 하나님의 영광중에 거하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절대로 속량된 죄인들 이외의 다른 자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자녀가 죄인으로 처음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갖고 왔던 겸손은 그 겸손이 피조물에게 합당하다는 사실을 깨들을 때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그 다음에 그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날 때의 겸손은 하나님의 경이로운 사랑의 기념비로서의 기억 속에서 가장 깊고 가장 값진 찬양의 음조를 갖게 된다.


    보다 깊은 겸손의 비결이 매일 죄를 범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로 한 순간도 자신의 위치를 잊지 않는 습관에 있다는 진리, 더 풍성한 은혜를 더욱 분명하고 생생하게 유지할 수 있는 축복의 자리이자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유일한 위치는 자신이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삼는 자의 위치라는 진리가 바울의 삶에 의해 더욱 강력하게 제시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과거에 은혜를 받기 전에 지었던 무서운 범죄에 대한 잊을 수 없는 기억, 그리고 일상적인 범죄를 피하려는 의식과 함께 항상 다시 들어올 준비를 하고 있는 음흉한 죄악의 잠재세력은 오직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만 막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로마서 7장의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라는 말씀은 소멸되지 않은 육신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로마서 8장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일찍이 나를 사로잡았던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시키셨도다”라는 말씀은 육신의 소멸이나 성화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육신의 행위를 정복하시면서 주시는 계속적인 승리를 나타내는 것이다. 건강이 질병을 물리치고, 빛이 어두움을 몰아내고, 생명이 사망을 이기는 것처럼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속에 거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영혼의 건강이시며, 빛이시며, 생명으로 영혼의 질병을 물리치시고, 영혼의 어두움을 몰아내시며 사망의 권세를 멸하신다. 더욱이 이 자신의 무력함과 위험에 대한 자각은 성령의 부단한 활동에 대한 믿음을 성령께 대한 강한 의존감과 조화시킴으로 오직 은혜로만 생활하는 겸손을 가장 큰 믿음과 기쁨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바울과 함께 했고 그로 하여금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더 많이 수고할 수 있게 했던 하나님의 은혜, 이교도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풍성함을 전파할 수 있게 한 은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넘치도록 부요한 은혜, 그 은혜는 바로 겸손이었다. 이 겸손은 죄인들로 하여금 자신이 과거에 죄를 범했으며, 지Viewer금도 강력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는 죄악에 다시 빠질 위험이 있다는 의식을 유지시켜 주는 것으로 죄인들이 가져야 하는 본성이며 영광인 것이다.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풍성하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죄를 처리하여 제거하는가를 보여준다. 즉 은혜의 체험이 많을수록 죄인이라는 의식이 더 강하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죄를 보여주고 그가 어떠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여 진정으로 겸손하게 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이다. 나로 하여금 내가 참 죄인이며 죄인이 있어야 할 가장 철저한 겸손의 자리에서 절대로 떠나지 않게 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우리를 겸손하게 하는 것은 율법으로 죄를 정죄할 뿐만 아니라 은혜로 죄로부터 구원하는 하나님의 계시이다. 율법은 마음을 두렵게 하고 상하게 할지 모른다. 그러나 은혜는 영혼에 기쁨을 주는 영혼의 제2의 본성인 겸손을 가져다준다. 아브라함과 야곱 그리고 이사야를 그처럼 겸손하게 만든 것은 바로 은혜 가운데 다가오셔서 자신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계시였다. 무에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자신의 피조물에게 만유가 되시는 창조주 하나님, 그리고 죄악 가운데 있는 죄인들에게도 모든 것이 되시는 구원의 하나님 안에서 영혼은 하나님을 섬기고 신뢰하고 예배할 때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충만하여 자아를 위한 여지가 없게 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될 때에만 “사람의 교만을 낮추고 그날에 주께서 홀로 높아지리라”는 약속의 말씀이 성취될 것이다. 그때에 죄인은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오는 하나님의 거룩한 구속의 사랑의 충만한 빛 가운데, 그리고 거룩한 사랑이 마음 속에 충만하게 거하는 경험 가운데 겸손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진실로 여러분은 자신의 죄에 사로잡히지 말고 하나님으로 사로잡혀야 자아로부터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제9장. 겸손과 믿음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5:44)


    그리스도인들은 완전한 평안과 안식, 흘Viewer러넘치는 사랑과 기쁨, 변치 않는 교제와 열매 맺는 생활과 같은 축복의 약속들을 볼 수는 있지만 그것들을 정말로 소유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무엇인가가 있음을 느낄 것이다.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교만이다. 믿음에 주어진 약속들은 아낌이 없고 매우 확실하다. 또한 이 약속으로 부르는 초청과 격려는 매우 강력하다. 믿음이 의지하는 하나님의 권능은 가까이 있고 역시 아낌이 없다. 따라서 우리의 축복들을 가로막는 교만은 곧 우리의 믿음까지 방해하는 것이다. 교만과 믿음이 본질적으로 절대로 화합할 수 없이 모순되는 것임을 아는 것과 동시에 우리는 믿음과 겸손이 근본에 있어 동일하다는 사실과 진정한 겸손을 갖고 있지 않으면 참된 믿음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교만을 마음에 품고 있으면서도 진리를 지적으로는 확신하고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지적 동의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살아 있는 믿음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무엇인지 잠깐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믿음이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굴복하여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도록 기다리는 것, 즉 우리가 지닐 수 있는 가장 겸Viewer손한 것이다. 즉 은혜로 주시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요구할 수 없고 아무것도 얻을 수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의존자로서의 우리의 처지를 수용하는 것이다. 겸손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준비시켜 준다. 자신만을 위하고, 자기의 뜻만을 주장하고, 자신을 의존하고, 자신을 높이는 교만은 아무리 은밀한 것일지라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고, 천국의 축복도 소유할 수 없다. 왜냐하면 교만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시고 마땅히 만유의 주로 존재해야 하심을 용납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믿음은 천국과 천국의 축복들을 감지하고 인식하는 기관 또는 감각이다. 믿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 즉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되시는 것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추구한다. 우리가 인간과 세상의 영광을 취하고 그것들을 사랑하고 열심히 지키려고 하는 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추구하지도 않고 받을 수도 없다. 교만은 믿음을 불가능하게 한다. 구원은 십자가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통해 오는 것이다. 구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신 가운데에서 십자가의 그리스도와 나누는 교제이다. 구원은 예수님의 겸손과의 연합이며, 예수님의 겸손을 즐거워하는 것이며, 예수님의 겸손에 참여하는 것이다. 교만이 우리를 지배할 때 우리의 믿음이 심히 약해지고 우리가 구원의 가장 필요하고 복된 부분인 겸손을 사모하거나 얻고자 기도하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겸손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님을 제시하며, 믿음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들을 제거하며,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을 돌리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만을 걱정한다. 우리의 헌신과 믿음을 그토록 피상적이고 지구력이 없게 만든 원인은, 우리의 교만과 자아가 은밀하게 우리 안에서 어느 정도로 역사하고 있는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홀로 내주하심과 권능으로 어떻게 교만과 자아를 몰아내실 수 있으신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떻게 이 새롭고 거룩한 본성이 옛 자아의 자리를 완전히 대신하여 우리로 하여금 진실로 겸손할 수 있게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는 절대적이고 끊임없고 포괄적인 겸손이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뿐만이 아니라 모든 기도와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에 있어서도 우리의 근본적 성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몰랐고, 우리가 마치 눈이 없이 보려고 하거나 숨을 쉬지 않고 살려고 하는 것과 같이, 어리석게도 겸손과 마음의 낮아짐이 없이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거나,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려고 하거나, 또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려고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교만하게 하나님의 축복들과 부요함을 독차지하려고 하는 옛 자아가 아직 존재하고 있는데 믿음을 가져보려고 온갖 애를 다 쓰는 잘못을 범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믿을 수 없었던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로를 바꿔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이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신 십자가와 죽음과 무덤의 길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길이었다. 이 길이 우리의 길이다. 예수님과 함께, 그리고 예수님과 같이 겸손하게 낮아지는 것이 우리의 간절한 소망과 열렬한 기도가 되도록 하자.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서 우리를 겸손하게 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기쁘게 받아들이자. 왜냐하면 이것만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구하는 습관과, 그 영광을 얻지 못할 때 받는 상처와 고통과 분노는 자신을 포기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만을 구하는 것 외에는 무엇으로도 치료할 수 없다. 완전히 영화로우신 하나님의 영광을 여러분의 전부로 삼으라. 그러면 여러분은 사람들의 영광과 자아로부터 해방되고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에 만족하고 기뻐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무(無)로부터 여러분은 믿음이 강하게 자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Viewer이고,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더 깊이 겸손에 잠길수록 하나님께서 더 가까이 오셔서 여러분의 믿음의 모든 소망을 이루신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제10장. 겸손과 자아의 죽음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빌2:8)


    겸손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다. 죽음에서 겸손은 가장 완전한 증거를 한다. 겸손이라는 꽃의 아름다운 열매는 자아의 죽음이다.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심으로 우리도 마땅히 걸어가야 하는 길을 여셨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끝까지 복종하심을 증명하실 수 있는 길은 오직 죽음 외에는 없었다. 죽음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인간성을 가지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늘 아버지의 영광에 오르실 수 있으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겸손은 반드시 우리를 자아의 죽음으로 인도한다. 그럴 때에 우리는 얼마나 완전하게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는가 증명할 수 있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타락한 본성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에 이르는 길, 겸손이 호흡이 되고 기쁨이 되는 새로운 본성의 완전한 탄생에 이르는 길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자신의 부활이 생명을 전하셨고, 성령 강림 때에 영광을 받으시고 보좌에 앉으신 온유하신 분께서 제자들 중에 거하시기 위해 실제로 하늘에서 내려오셨던 일을 기억한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심을 통하여 이 권능을 쟁취하셨다.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생명은 그 가장 깊은 본질에 있어 죽음에서 나온 생명, 죽기까지 복종하고 죽음을 통하여 얻은 생명이었다. 예수님의 삶, 인격, 임재는 모두 죽음의 표적, 죽음에서 태어난 생명의 표적을 지닌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 안에 있는 생명도 항상 죽음의 표적을 지닌다. 예수님의 생명의 능력은 오직 영혼에 죽음의 정신, 그 죽으셨던 분의 정신이 거하여 역사함으로만 가능하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표적들 중 첫 번째이며 가장 중요한 표적은 바로 겸손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오직 겸손만이 완전한 죽음으로 인도하고, 오직 죽음만이 완전한 겸손으로 인도한다. 겸손과 죽음은 본질에 있어 하나이다. 겸손은 싹이다. 이 싹의 열매는 죽음에서 완전하게 무르익는 것이다.


    겸손은 완전한 죽음으로 인도한다. 예수님께서는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며, 죽으심으로 가장 귀한 증거, 곧 Viewer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양도한다는 완전한 증거를 제시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인성과 연합된 생명을 포기하셨는데, 곧 자신과 유혹하는 죄에 대해 죽으셨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인간으로 하나님의 완전한 생명에 들어 가셨다. 만일 자신을,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고난을 당하는 종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무한한 겸손이 없었다면 예수님께서는 절대로 죽지 않으셨을 것이다. 자아의 죽음은 우리들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역사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었다.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은 죽음과 부활의 과정을 통과했다. 이제 우리는 진실로 죄에 죽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들의 성격과 행동에서 이 죄에 대한 죽음이 완전하게 나타나는 것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권세를 전달하는 정도에 달려 있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필요하다. 그 가르침은 만일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그리스도와 완전한 교제 가운데 들어가서 자아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알기 원하면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들의 의무다. 완전히 무력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맡기고, 자신을 죽이거나 살릴 수 없는 우리들의 무능력에 대해 진심으로 동의하고, 온유하고 인내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복종하는 마음으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통감하라. 모든 굴욕을 받아들이고, 여러분을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 모든 사람들을 우리들을 겸손하게 하는 은혜의 수단으로 생각하라.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그러한 겸손을 우리들이 전심으로 겸손을 사모하는 증거, 겸손을 구하는 최선의 기도,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역사를 위한 준비로 인정하실 것이다. 그리고 성령의 강건케 하시는 능력으로 그리스도를 우리들 안에 완전하게 계시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종의 형태가 우리 안에 진정으로 이루어지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심령에 거하시게 될 것이다.


    겸손은 자아의 죽음으로 완전해진다. 보다 큰 은혜의 참된 체험, 헌신에 있어서의 진정한 진보, 그리스도의 형상의 본받음의 진정한 향상, 이 모든 일의 근저에는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성격과 습관의 변화도 증명을 하는 자아의 죽음이 반드시 존재한다. 자신의 명예를 구하지 않고, 자신을 비우고, 종의 형태를 취하는 겸손보다 더 확실한 자아의 죽음을 나타내는 표적은 없다. 하나님의 어린양의 온유하고 다정한 겸손이 보이지 않고, 또한 그러한 겸손을 거의 구하지도 않으면서 멸시와 버림을 받은 예수님,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어린양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으니, 곧 온유와 죽음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형태의 하나님의 어린양을 받아들인다고 말해야 한다. 하나님의 어린양 안에서 온유와 죽음은 분리될 수가 없듯이, 우리에게 있어서도 이 온유와 죽음은 분리되지 않아야만 한다.

    Viewer 

    만일 우리가 이러한 일을 해야 된다면 얼마나 절망적이겠는가? 그러나 이 일은 하나님에 의해 이미 이루어지고 완결되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의 죽음을 단번에 영원히 이루셨다. 그리고 승천하시고 단번에 영원히 지성소에 들어가셔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고 능력 가운데 우리와 교통하심으로 예수님 자신의 죽으심으로 얻은 생명을 우리의 것이 되게 하셨다. 우리가 겸손을 추구하고 실천하면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를 때, 더 큰 겸손이 필요하다는 의식이 깨어나고, 열정과 소망이 일어나고, 믿음이 강건하여지고, 성령의 충만함을 사모하고 요청하고 받는 법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성령의 충만한 능력 가운데 매일 자아와 죄에 대해 죽음으로 겸손을 우리 삶을 지배하는 정신이 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6:3,11,13).

    그리스도인의 자아의식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받는 정신에 의해 완전히 감화되고 그 정신을 특징으로 나타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항상 두 가지 표적을 지녀야 한다. 그 중 한 가지는 진정한 겸손 가운데 뿌리를 예수님의 무덤, 자아와 죄에 대한 죽음까지 깊이 내리는 생활이고, 또 한 가지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 가운데 머리를 예수님께서 계신 하늘까지 드는 생Viewer활이다. 그리스도의 겸손으로 들어간 영혼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기고 그리스도를 배우고 영접하여 겸손과 온유, 그리고 서로 사랑 가운데 오래 참음으로 행하게 될 것이다. 이 죽음의 삶은 그리스도와 같이 온유와 겸손 가운데 나타나는 것이다.


    제11장. 겸손과 행복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12:9)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큰 계시를 받음으로 인하여 스스로 높아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의 육체에 가시를 주심으로 겸손을 유지하게 하셨다. 바울은 그 가시의 제거를 위하여 하나님께 세 번이나 간구했지만, 하나님의 응답은 그 시련이, 약함과 겸손 가운데 주님의 은혜와 능력이 가장 잘 나타날 수 있는 축복이라는 응답을 주셨다. 그 즉시 바울은 그 시련과의 관계에 있어 새로운 단계로 들어갔다. 그는 그 시련을 참는 대신 가장 기쁘게 그 시련을 영광으로 여겼고, 그 시련으로부터 해방되기를 구하는 대신 그 시련에서 즐거움을 얻었다. 그는 겸손의 자리가 축복과 능력과 기쁨의 자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사실상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겸손을 추구할 때 이 두 가지 단계를 경험한다. 그는 겸손을 추구하고 겸손을 얻고자 기도하고 있지만 아직 부담감과 속박감을 느낀다. 자신을 낮추는 일이 아직 그에게 자발적인 삶의 표현이 되지 않았고, 또한 본질적으로 겸손한 성품이 되지 않은 것이다. 아직 겸손은 그의 기쁨과 유일한 즐거움이 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나는 내가 약한 것을 가장 기쁘게 자랑하며, 무엇이나 나를 겸손하게 하는 일에서 즐거움을 얻는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겸손의 단계에 이르는 소망을 가질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바울을 이러한 겸손의 단계로 인도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계시이다. 오직 하나님의 임재하심만이 자아를 드러내어 몰아낼 수 있고, 오직 예수님의 임재하심에 의해서만 우리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구하는 모든 욕망이 제거되고 예수님을 더 완전하게 나타낼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시켜 주는 겸손을 우리가 즐거워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이다. 겸손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임재와 능력을 경험하게 함으로 우리가 겸손을 최고의 축복으로 여기는 자리에까지 인도한다.

    신자가 배워야 할 최고의 교훈은 겸손이다. 열정적인 헌신과 뜨거운 열심과 놀라운 체험이 있을지라도 주님께서 특별한 섭리로 보호해 주시지 않는다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 모든 것이 자신을 높이는 교만Viewer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고의 거룩함이 가장 깊은 겸손이라는 교훈을 배워야 하며, 이러한 겸손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미쁘신 주님과 신실하신 성령의 특별한 섭리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약함을 기쁘게 자랑하고 있는가? 바울이 한 것처럼 비방과 궁핍과 환난 중에 즐거워하는가? 우리는 정당한 것이든지 부당한 것이든지 책망을 받을 때, 친구나 적이 우리를 비난할 때, 다른 이들이 주는 위해나 고통이나 환난을 당할 때,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고, 우리의 쾌락이나 명예는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겸손으로 우리가 즐거워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기회로 받아들이는 법을 터득했는가? 자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짐으로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든지, 무슨 일이 행해지든지 예수님께서 모든 것이 되신다는 생각 속에 자아가 사라지고 매몰되어 버린다면 그것은 진실로 축복이며 천국의 깊은 행복인 것이다.


    주님께서는 사랑의 관심을 가지고 “우리가 교만해지지 않도록” 감시하신다. 우리가 교만해질 때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 악을 발견하도록 하시고 그 악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신다. 우리가 주님의 은혜가 우리의 모든 것임을 배우고 우리를 낮추는 일들을 즐거워하게 될 때까지 주님께서는 우리를 시련과 약함과 환난 가운데로 인도하여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신다. 우리의 연약함 중에서 완전해지는 주님의 능력과 우리의 빈 마음을 채우사 만족하게 하시는 주님의 임재는 절대 실패하지 않는 겸손의 비결이 된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온전히 바라보며 바울과 같이 “내가 아무것도 아니나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고후12:11)고 말할 수 있다. 바울은 많은 굴욕을 받음으로 결국 진정한 겸손의 자리에 이르렀고, 이와 함께 자신을 낮추는 모든 알들에서 놀라운 기쁨과 영광과 희락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교만의 위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크고 가까이 있다. 그리고 겸손의 은혜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크고 가까운Viewer데 있다. 예수님의 겸손은 우리의 구원이시고, 예수님 자신께서 우리의 겸손이시다. 우리의 겸손은 예수님의 돌보심이고 예수님의 역사이다. 예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도 족하여 교만의 유혹을 물리치게 한다. 예수님의 강하심은 우리가 약할 때 완전하여진다. 약함 중에서, 그리고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비천하게 하는 모든 일 중에서 기쁘게 즐거워하고 자랑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 안에 거하실 것이고, 우리가 진심으로 우리를 겸손하게 하는 모든 일들에 동의하고 믿음과 기쁨으로 받아들일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가장 깊은 겸손이 가장 참된 행복이고 무엇으로도 멸할 수 없는 기쁨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제12장. 겸손과 영광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14:11)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4:10)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 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6)


    우리는 어떻게 교만을 이길 수 있을까? 그것은 첫째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일이라고 말씀하시는 바를 행하는 것인데 그것은 곧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일이라고 말씀하시는 바를 하나님께서 행하시도록 의뢰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이다. 이 명령은 “자기를 낮추라”는 것이다. 이 명령의 의미는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모든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믿음 안에서, 승리를 위한 더 큰 은혜의 확신 가운데, 그리고 순간순간 마음의 교만과, 교만의 활동을 비춰주는 빛에 따라 생활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와 타락의 위험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불변의 명령 아래 굳건히 서서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마음속에서 또는 외부에서, 친구나 적을 통해, 자연이나 은혜를 통해, 여러분의 겸손의 필요성을 상기시켜 주시고, 여러분이 겸손할 수 있도록 도와주심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여라. 겸손은 진실로 모든 덕의 어머니이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첫째 되는 의무이며, 영원한 우리 영혼의 도피성으로 여기고, 여러분의 심령을 이 모든 축복의 근원인 겸손에 고정시켜라. 하나님의 약속은 확실하다.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이 한 가지 일 – “자신을 낮추라” – 을 이루라.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은혜를 주시고, 때가 이르면 여러분을 높이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시는 방법은 두 가지 단계로 특징 지워진다. 먼저 준비의 단계가 있는데, 이 단계는 하나님께서 명령과 약속으로 사람들을 일깨우고 교육하고 훈련시키는 때이다. 이때에 사람들은 거룩하고 더 나은 무엇인가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노력과 자신의 무능, 실패와 부정적인 성공이 뒤섞인 경험을 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 성취 단계가 온다. 이때에 성도들은 믿음으로 약속들을 유업으로 받고 수 없이 헛된 노력을 하며 얻으려고 애쓰던 것을 드디어 소유하고 즐거워하게 된다. 이 법칙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에 적용되며, 다른 모든 기독교의 덕을 추구하는 데에도 역시 적용된다. 우리의 구원과 관련된 모든 일에 있어 주도권은 하나님에게 있고 또한 하나님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주도권이 이루어졌을 때 비로소 인간의 차례가 온다. 인간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구원을 얻으려고 할 때 자신의 무능을 알아야 하며, 자신에 대하여 절망하고 자신에 대하여 죽어야 하며, 처음에는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것을 완전히 깨닫고 지혜롭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지 못하고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으나 나중에는 하나님께서 만유가 되신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사모하고 받아 들이게 되는 것이다.


    겸손을 추구함에 있어서도 똑같다. 모든 Viewer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자신을 낮추라”는 명령은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명령을 청종하고 순종하려는 성실한 시도는 두 가지 고통스러운 깨달음으로 보상될 것이다. 그 첫째 보상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뿌리 깊은 교만 즉 자기를 낮추기 싫어하고. 내세우기만 좋아하고, 하나님에게 완전히 복종하기를 싫어하는 깊은 교만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깨달음이고, 두 번째 보상은, 이 괴물을 제거하려는 우리의 모든 노력이나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우리의 모든 기도가 얼마나 무력한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소망을 하나님에게 두고 자기 안에 있는 교만의 모든 방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꾸준히 겸손하게 행하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인성의 법칙을 안다. 인간의 행위는 습관을 낳고, 습관은 성질이 되고, 성질은 의지를 형성한다. 이렇게 하여 형성된 의지가 인격이다. 이 법칙은 은혜의 역사에 있어서도 다르지 않다. 즉 끊임없이 반복되는 행동이 습관과 성질이 되고, 그 습관과 성질이 의지를 강화할 때, 의지와 행동에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권능과 성령으로 임하시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오만한 마음을 회개하Viewer고 내어버린 그리스도인은 더 깊은 겸손한 심령의 은혜로 보상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 심령에서 예수님의 성령께서는 승리를 거두시고 새로운 본성을 성숙시키시고 이제 온유하고 겸손한 주님께서 영원히 거하시게 된다.


    남 앞에 자신을 낮추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이다. 피조물의 가장 큰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을 받아 즐거워하며 선포하는 그릇이 되는 것뿐이다. 이런 그릇이 되려면 오직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되시도록 기꺼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인정해야 한다. 물은 항상 낮은 곳으로부터 채워진다.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더 낮아지고 더 빈 그릇이 될수록 하나님의 영광은 더 빠르게, 그리고 더 충만하게 흘러 넘칠 것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높이심은 하나님과 무관한 어떤 외형적인 것이 아니며, 또한 그런 것일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셔야 하는, 또한 하나님께서 주실 수 있는 모든 것은 오직 자신을 더 많이 주시는 것, 즉 하나님 자신을 더 완전하게 소유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높이심은 그 본질에 있어서 우리 자신의 겸손의 효과이며 결과이다. 하나님의 높이심은 바로 신령한 겸손이 우리 안에 거하게 하시는 은사이니, 곧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어린양의 겸손을 닮고 소유하도록 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충만히 받기에 합당하게 하는 은사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높이시리라”. 우리가 예수님의 겸손과 더 깊은 관계를 갖고 자신을 낮출 때 우리는 예수님의 겸손의 정신, 하나님의 성령과 영광이 우리에게 거하심을 알게 될 것이다.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임재와 능력은 겸손한 심령의 소유자들에게 임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자신의 적법한 자리를 차지하실 수 있으실 때 우리를 높이실 것이다. 자신을 낮춤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여러분의 주요관심사로 삼으라.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겸손을 완전하게 하시고 여러분의 삶 전체에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불어넣으심으로 여러분의 영광을 자신의 관심사로 삼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충만하고 풍성한 생명이 여러분을 사로잡을 때 우리의 자아는 자연스럽고 즐겁게 사라지고, 자신에 대한 생각과 바람도 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점령하시고 모든 것을 채우시기 때문이다. 나의 자아가 사라지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나를 온전히 소유하실 때뿐이다. 작은 먼지가 나부끼고 있는 것이 보이는 것은 밝은 햇빛이 거기에 비취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겸손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햇빛 속에서 존재하는 티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이시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임재하심 앞에서 겸손하고 아무것도 되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고귀한 업적이며 가장 충만한 업적이라는 사실을 믿도록 깨우치소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사57:15)


    나로 더 비어지고 더 낮아지게 하소서!

    비천하여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가 되어도,

    그리스도로, 오직 그리스도로만 채워진,

    하나님의 더 거룩한 그릇이 되게 Viewer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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